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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세이 다 쓴 나 개쩔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3. 3. 14. 22:56

    휴직신청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휴직의 장점을 물어본다면 열손가락으로 꼽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을 말하라면 '남에게 보이는 나'를 내려 놓아도 된다는 점이다.

     

    '나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자'라는 사회적 미덕이 널리 알려져 있는 회사에서 슬플 때 슬퍼하고, 우울할 때 우울해 하기는 쉽지 않다. 슬프더라도 보고서를 써야 하고 우울하더라도 회의에서 웃어야 한다. 나는 이런 것에서 잠시 자유로워져 있다. 본질의 나를 마음껏 표출하고 있다기 보다는, 너무 오랫동안 사회적 나로 있음으로서 본질의 나는 무엇이었는지 찾아나아가는 과정이다. 

     

    본질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30대에 접어드니 어렸을 적 기억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MBTI 검사를 하면 ENTJ가 나오고, 에니어그램 검사를 하면 3w4가 나오기에 결과를 토대로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역추측 하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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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남들과 경쟁하는 것을 좋아했고 경쟁에서 나오는 명확한 결과가 좋았다. 경쟁은 아무렴 이기는 것이 기분이 좋기에 공부든 게임이든 백일장이든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일들은 열심히 했고 성과도 좋았다.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더욱 넓히고 싶은 욕심도 늘어났다. 누가 뭐라하든 내가 잘 하고 싶은 분야를 잘하게 되는 것은 좋았다. 이것은 계속되는 자기계발로 이어졌다. 어렸을 때의 드문한 기억과 성격검사를 조합해보면 '타인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끊임없이 성취를 추구하는 나'가 본질의 내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성격이 우월하다고 생각 한 적은 없다. 어느 성격이든 그 성격이 파생하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내 성격의 경우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을 어렸을 때 부터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경쟁에서 이기려면 자기중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만 생각하는게 가장 효율적이다.

     

    중학교 때 수학 성적이 모자라서 방학동안 보충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부모님께 말한적이 있다. 부모님은 사정이 어려워서 안된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의 슬픈 감정 보다는 내가 심사숙고해서 필요하다고 말한 것을 거절 당한 분노가 더 컸다. 당시에 '힘들게 보내주신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꼭 듣게 해주세요.'라는 식으로 유도리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건만 나는 그런 게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성실한 딸로 보였겠지만 나는 그런 부분에서 부모님과의 마찰이 꽤 있었다.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배려심'과 '겸손'을 강조했다. 부모님이 보기에는 내가 사회에 나가서도 이기적인 막말(?)을 할까봐 염려를 많이 하셨나 보다. 

     

    그런 부모님은 나에게 칭찬이 인색했다. 내가 힘들게 얻은 성과를 자랑할 때면 '잘했다' 라는 말 뒤에 '항상 겸손해야 하고, 남들을 배려하여 너무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뒤따랐다. 대학에 입학한 뒤 여러 자소서와 면접을 거쳐 인턴에 합격했을 때 엄마는 언니가 아직 취업을 못했으니 너무 기쁜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했다. 부모님이 그토록 원하던 대기업에 합격했을 때도 사촌동생이 대학을 못 갔으니 너무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꼭 뒤따랐다. 부모님이 칭찬을 안 해주신것은 아니지만 꼭 꼬리처럼 붙어다니는 그 말들이 나는 너무 속상했다. 어느샌가부터 주변사람들에게도 자랑을 안 하게 되었다. 내가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보다 '지금 얘가 안 좋은 상황에 처했는데 내가 눈치없이 자랑하는거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부터 하였다. 

     

    또한,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이 '남들보다 성공한 나'를 만들기 위해 불을 붙였다. 나는 나를 항상 가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부모님이 가장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나는 대학생때부터 가장의 책임을 느꼈다. 부모님이 '언니와 나를 키우는 데 얼마가 들었다', '나의 노후계획은 자식들이다' 라는 말을 할 때 마다 나는 정말 짜증이 났지만 차마 그것을 무시하지도 못했다.

     

    나는 나를 언제나 채찍질 하였다. 좋은 성과를 냈을 때는 그것을 기쁨의 전화 몇통과 하룻밤 술자리로 털어버리고 항상 다음을 생각했다. 대학생 시절 2천만원 짜리 창업 공모전에서 우승했을 때는 부모님은 혹시라도 내가 취업 준비는 안 하고 창업을 꿈꿀까봐 많이 걱정하셨기에, 팀원들과 회식을 하고나서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가 혹시라도 실패하게 된다면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집'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누가 뭐라한적도 강요한적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속상한 기억은 많지만 부모님도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많지 않으실테니 원망스럽다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과거에 머무르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엄격하게 교육하신 덕분에 내가 자기중심적에서 사회적으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부모님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가면은 나의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본질의 성격에 어두운 면을 덮어버리고 밝은 면만 존재하는 내가 된 것 같았다. 

     

    회사에 다니면서 '일 잘하는 000', '배려심 넘치는 000', 의 타이틀이 붙는 게 좋았다. 빨리 성장하고 싶어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해보겠다고 했다. 어렸을 적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이기적'이라는 단어도 듣기 싫었다.

     

    회사에서의 나는 예스맨 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해마다 굵직한 성과를 많이 냈다고 생각한다. 1년차때 신입사원 연수에서 팀프로젝트로 1등을 하였고, 2년차때 사업부에서 우수 성과자로 인정되어 연봉과 인센티브가 둘 다 올랐다. 3년차때는 사내벤처 프로그램에서 신규 아이디어를 사업화 시키며 회사 역사상 7번째 사업화 아이템이 되었다. 4년차 때는 정부지원금 15억원을 수주하며 200명 대상의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이 살면서 회사를 다니며 한번도 하기 힘든 일들을 여러가지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남에게 기대치를 맞췄고, 끊임없이 높은 목표를 세우고 해내야 했다.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왜 내가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도 도맡아서 했다. 모든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충족하고 싶었다. 그 무렵의 나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녁에도 주말에도 일을 했고, 공휴일에도 일을 했다.

     

    2022년에는 2번의 선거가 있었는데, 새벽까지 일을 하느라 2번 다 결과를 보고 잤다. 주말 근무를 너무 많이 등록해서 팀장님이 근무 신청을 반려하기도 했다. 일을 하지 않을 때면 혹시 내가 빠트린게 없을까 메일과 보고서를 뒤적이곤했다. 그것은 어느샌가부터 내 의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부서진 기관차처럼 폭주하며 절벽이 나오기 전까지 달릴 뿐이었다.  

     

    팀장님이 쉬엄쉬엄 일을 해라라고 하면 위선적이라 생각함과 동시에 팀장님이면서 왜 일을 못하게 하나라는 불만도 있었다. 나는 나에게도 항상 불만이었다. 잘한 것보다 놓친 것이 더 눈에 띄었다. 어떤 작은 성과에도 기쁘지 않았다. 항상 다음에 할 일을 떠올리고는 대학생때 처럼 술 한잔으로 치하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성과를 칭찬해줄 때면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냥 내 기분이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라는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남에게는 친절했지만 나 자신에게는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친절하지 못했던 결과값은 컸다. 결국 우울증과 불면증에 걸렸다. 내가 불면증에 걸리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제발 불면증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 할 것이다. 새벽 5시까지 잠을 자지 못한 채 있었다. 2시간 정도 선잠을 자면 회사에 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7시에 알람이 울리면 준비를 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매일 하루에 2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한 나는 메일 한 통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 마치 한라산을 완등하고 오라는 과제처럼 느껴졌다. 결국 몸과 머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쯤, 나는 내가 고장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휴직계를 신청했다. 연말평가 한달 전이었다. 평가를 위해 살았던, 남을 위해 살았던 거진 1년의 시간들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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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휴직을 신청한지 6개월이 지난 나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으면, 산책을 하다 보면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했을까? 어디까지는 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할 수 없고 어디까지는 내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나를 몰아붙였을까? 모두 지난날임에도 나는 거기서 다시 한 번 의미를 찾고자, 교훈을 찾고자 되새김질 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되풀이 한들 답은 나오지 않았다. 

     

    휴직을 하고 어떠한 경제활동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언가 성취감을 얻기에는 쉽지 않다. 병원이나 지인들이나 다들 편안하게 쉬라고 말하지만, 본질의 나는 그게 쉽지 않다. 나는 가만히 있을 때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울증 때문에 온종일 무기력감에 빠져 씻지도 않은 채 누워 있을 때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 어떤날도 침대에 누워 뒹굴 거리던 중 작년도에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수학자의 졸업 연설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인터뷰도 찾아봤다. 작년에 스쳐 지나가듯이 봤던 것인데, 내 스스로 실패를 겪고 나니 또 다르게 보인다.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 그가 반복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때 마음에 꼬인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깨달았다. 끝없이 성취와 성공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나는 나에게 기대치를 낮춰야 했구나. 아무도 나에게 칭찬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나에게 칭찬을 했어야 했다. 남이 칭찬 해주길 바랄 때 내가 망가졌다. 나는 이력서에 한 줄 남길 수 있는 큰 일을 했을 때 뿐만 아니라, 매일 내가 마음먹은 것을 해내는 나를 칭찬했어야 했다. 그것은 앞으로 큰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성공들을 인정하며 그것을 모아 원하는 내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고 샤워를 했을 때 '와 나 개쩔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샤워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샤워를 한 내가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책을 읽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첫 행동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달려나가고 있다.

     

    책 <습관의 디테일>에서 행동과학자인 BJ포그는 '작은 성공에서 축하의 유일한 규칙은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고 성공의 느낌을 선사하는 말이나 행동 어떤 것을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자신에게 맞는 축하를 해주면 된다. 축하해! 같은 오그라드는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것을 '개쩔었다'라고 하기로 했다. 내일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에게 극찬을 보내자. 누가 아무것도 아니라 무시해도, 그것이 내가 나를 유지하게 만드는 앞으로를 살아가게 만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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